개교 76주년·종합대학 승격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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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76주년·종합대학 승격 70주년
2025-05-16 교류/실천
‘문화세계의 창조’, ‘학문과 평화’의 여정
시대와 역사 성찰하면서 전일적·전환적 사유 세계 펼쳐
개인과 사회, 세계와 미래에 기여하는 경희의 가치와 전통 확장
5월 18일은 경희의 개교기념일이다. 경희는 올해 개교 76주년을 맞는다. 올해는 경희가 종합대학 설립 인가를 받은 지 7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9년 2년제 가인가 초급대학으로 출범한 경희는 1952년 4년제 대학 설립 인가를 거쳐 1955년 2월 28일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이를 기점으로 경희는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세계적인 대학’이라는 목표 아래 ‘경이로운 경희’의 역사를 써내려 왔다. 개교기념일을 맞아 경희정신과 역사, 미래비전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경희 서사의 시작, 시대의 위기 넘어서고자 했던 꿈과 희망
경희는 종합대학 승격 기념으로 1955년 5월 10일 교문인 등용문(登龍門)을 세웠다. 등용문에서 ‘문화세계의 창조’가 새겨진 교시탑, 교시가 상징적으로 표현된 본관 석조전, 그 우측 언덕으로 웅장하게 솟아오른 평화의 전당으로 이어지는 캠퍼스에는 경희의 미래지향적 이상향이 담겨있다. 인간의 인간적인 세상,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경희가 품어온 이상향이자 미래향이다.
그 출발에는 시대의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한다. 경희는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격동기에 양심이 무너진 현실을 마주하고 문제의 본질을 문명사적으로 성찰했다. 국가와 민족, 이념과 체제의 경계를 넘어 인류의 보편 가치와 규범을 찾아 나섰다. 이는 경희정신의 모태가 된 경희학원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의 저서 『문화세계의 창조』(1951년 5월 18일 탈고, 6월 30일 발간) 서문에도 나타난다. “새로운 세기는 새로운 정치 이념을 필요로 한다. 세계는 지금 조난당한 파선(破船)! 창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묘안과 창의적인 방안을 찾지 않는 한 침몰은 막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 이념은 현실정치 이념과 다르다. 경희는 고착된 틀의 정치, 대립과 폭력, 무고한 살상을 불사하는 현실정치가 아니라 평화로운 인간의 인간적인 미래를 열어가자는 사유 세계를 펼쳤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결과 교호(交互) 작용에 따라 생성과 변화, 창조와 소멸을 거듭한다는 사상적 토대 위에서 인간의 의식적·의지적 노력이 만들어 내는 창조적 가능성을 포괄한 전일적·전환적 사유를 추구해 왔다. 이러한 사유 세계와 함께 주어진 시대의 난제를 돌파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인류의 책무이자, 권리에 주목해 왔다. 경희학원의 오랜 전통인 ‘학문과 평화’, 평화의 전당에 새겨진 ‘인간에겐 사랑을, 인류에겐 평화를’이란 문구는 그 정신을 함축한다.
경희정신은 교명, 교가 그리고 경희의 역사에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1960년 3월 1일 개명한 교명 ‘경희(慶熙)’는 객체와 주체, 양과 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생성의 법칙과 일원론적 우주관을 함축하고 있다. 광활한 우주에 던져진 왜소한 인간의 전환적 사유와 함께 ‘인간의 문화세계’를 창조해 보자는 소망을 담고 있다. 경희의 교가는 “온오한 학술연구 온갖 노력 바치고 변전하는 세계의 진리를 연구하여 (···) 인류 위해 일하고, 평화 위해 싸우세”를 노래한다.

먼 미래 내다보면서 영원히 발전해 나갈 경희 꿈꿔
경희의 역사는 1951년 피란지 임시수도 부산에서 신흥초급대학(1949년 2년제 가인가 설립)을 인수하면서 시작했다. 경희학원 설립자는 저서 『문화세계의 창조』를 탈고한 1951년 5월 18일 대학을 인수했다.
신흥초급대학은 한국전쟁 발발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란한 뒤 학교 문을 열 형편이 되지 않아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희는 1951년 8월 20일 부산 동광동 임시 교사에서 개강식을 개최하고, 새출발을 알렸다. 이날 교훈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도 발표했다. 1952년 12월 9일에는 4년제 정규대학 설립 인가를 획득한 데 이어 종합대학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1953년 1월, 화재로 교사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해 봄, 부산 동대신동에 교사를 다시 건립했다. 1953년 3월에는 첫 학위수여식을 거행했다.
그해 7월 정전 협정이 체결됐다. 부산에 피란 온 대학들이 서울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경희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서울 환도는 큰 결단이 필요했다. 부지 물색과 캠퍼스 건설 등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고난의 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경희의 새 미래를 건설하는 희망의 길이기도 했다.
설립자는 천장산 일대 30여만 평의 교지를 확보한 후,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천장산은 산세가 마치 하늘을 나는 봉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고황(高凰)산이라고 불린다. 설립자는 이곳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봉황처럼 큰 뜻을 품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길 바라면서 미래의 꿈을 설계했다. 대학 캠퍼스의 심장부인 본관은 적어도 천년 앞을 내다보는 건물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경희의 미래를 그려 넣었다. 70여 년 전, 경희는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영원히 발전해 나갈 경희를 꿈꾸며 서울캠퍼스 건설이라는 역사를 만들어갔다.
학술 탁월성 기반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세계적인 대학’을 향해
경희는 1954년 3월 24일 서울 회기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했다. 건물은 3동 12교실의 임시 교사(450평 목조건물, 현 문과대학 자리)를 비롯해 임시 사무실(현 중앙도서관 옆 봉수대 자리), 대학원관(현 신문방송국 건물)이 전부였다. 당시는 휴전 직후로 한반도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세계 최빈국의 신생 대학, 경희가 처한 상황이었다. 부산 동대신동 신교사를 지은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재정적 난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경희는 국내,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한 미래를 꿈꿨다. 설립자는 1954년 5월 20일 학장 취임식에서 “어떤 특정 대학을 따라서 대학을 만들고 싶지 않다. 한국의 어느 대학보다도 동양적이고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지금보다 백배, 천배의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포부를 밝혔다. ‘세계적인 대학’이라는 목표를 공표한 것이다.
‘세계적인 대학’의 의미는 설립자가 남긴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1964년 10월 2일 개교 15주년 기념 9회 학원제에서 발표된 이 메시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경이로운 경희’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 바탕이 된 경희정신을 되새긴다. 그러면서 최후의 목표가 ‘세계적인 대학 건설’에 있다는 담대한 포부를 전한다. 설립자는 후학들에게 “‘세계적인 대학 건설’이라는 큰 목표가 현명한 여러분들에 의해서도 계속 추진됨으로써 학술 발전을 통한 인류의 문화 향상과 복리 증진, 나아가서는 세계평화 건설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한다. 이는 경희의 목표가 탁월한 학술의 미래를 선도하는 대학 본연의 책무와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실천적 책무를 아우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목표와 지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화세계의 창조’와 ‘학문과 평화’의 가치, 지구사회로 확산
경희는 대학을 인수한 지 10년 만에 일관 교육·학술 체제를 구축했다. 경희중·고등학교(1960년)에 이어 경희초등학교(1961년)와 경희유치원(1961년)을 설립했다.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교육의 전 과정을 일관된 체제로 묶어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학원을 설립한 것이다. 이후 경희사이버대학교(2001년), 경희의료원(1971년), 강동경희대학교병원(2006년), 후마니타스 암병원(2018년)을 설치·운영하며 교육·학술·의료기관을 아우르는 종합학원 체제를 갖췄다.
경희는 1961년 종합학원 출범 후,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1965년 인수한 동양의과대학을 바탕으로 의학, 한의학, 치의학, 약학, 간호학을 아우르는 국내 유일의 종합 의학 계열 체계를 구축했다. ‘질병 없는 인류사회’를 위한 노력은 1971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경희의료원을 개원하기에 이른다. 1979년에는 53만 평 규모의 국제캠퍼스 설립을 인가받았고, 1984년에는 광릉캠퍼스 평화복지대학원을 설립했다. 이로써 인문사회, 의학, 기초과학, 예술 중심의 서울캠퍼스, 공학, 응용과학, 국제학, 현대예술, 체육 중심의 국제캠퍼스, 평화학 센터로서의 광릉캠퍼스 체제가 완성됐다.
평화복지대학원은 1993년 대학으로는 세계 최초로 유네스코 평화교육상을 수상했다. ‘문화세계의 창조’, ‘학문과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경희의 노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그 배경에는 설립 초기인 1950년대부터 추진해 온 평화·학술·교육·의료 활동이 있다. 경희는 농촌운동과 자연보호운동, 밝은사회운동, 인류사회재건운동, 네오르네상스운동, 의료봉사 활동을 통해 시대와 국가사회가 초래한 인도적·지구적 난제 해소를 위한 노력을 거듭했다. 각종 국제 학술회의를 주도해 위기에 처한 세계를 직시하면서 교육을 통한 평화 구현 노력도 지속했다. 1965년 세계대학총장회(IAUP) 창립, 1981년 유엔 세계평화의 날과 해 제정에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경희의 학문과 평화 운동이 지구사회 차원으로 확장된 상징적 결실이었다.
유네스코 평화교육상 수상 이후에도 경희는 서울 NGO 세계대회 개최(1999년), 사이버대학교 설립(2001년), 세계시민포럼·세계시민청년포럼 개최(2009년), 후마니타스칼리지 출범(2011년), 세계대학총장회 창립 50주년 기념식 공동 개최(2015년), 미래문명원 체제 출범(2021년)의 역사를 써왔다. 경희가 추구해 온 ‘문화세계의 창조’와 ‘학문과 평화’의 가치를 세계시민사회와의 관계성 속에서 구현해 나가고 있다. 최근 경희는 문화세계의 새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인류의 미래, 평화의 미래에 관한 탐색을 지속하면서 학문과 평화의 지구적 존엄(Global Eminence)을 향한 길을 열어가고 있다.
시대의 위기에 문제의식 갖고 돌파해 내는 의지 더욱 키워
한국전쟁 중에 태동한 경희는 그 시대 상황을 ‘만경창파(萬頃蒼波)와도 같은 살풍경(殺風景)’, ‘창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구원을 기다리는 조난당한 파선’으로 인식했다. 새로운 희망이 절실한 현실에서 전일적 사유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인류의 미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시의 문제의식과 해결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우리는 지금 전례 없는 규모의 폭력과 갈등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전쟁, 기후위기, 생태계 파괴, 분열적 현실정치 등으로 점철된 이 시대의 위기는 인류와 문명의 존립 자체를 뿌리째 뒤흔들 수 있다는 성찰적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다. 전일적 안목에서 전환 의식을 고양하고, 시대의 난제를 해소하는 일에 도움이 될 사회, 문화, 의식 차원의 저변 마련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희는 시대의 위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노력해 온 역사와 전통, 가치와 철학을 계승·발전해 문명사적 전환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교육, 학술, 실천, 의료 분야의 탁월성 추구를 축으로 개인과 사회, 세계와 미래에 기여하는 경희의 가치와 전통을 더욱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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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은경 oek8524@khu.ac.kr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